제작 뒷이야기

1. 이렇게 <감각의 제국>은 출발했다.

2년전 여름, 창조사를 해체했을 때 시라이씨가 요미우리신문인가 뭔가에 글을 썼다.
그 마지막에, 이때까지 항상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 영화의 길을 만들어간 내가,
다음에 어떤 방법을 창조할 것인지 지켜 보고싶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무거운 말로서 나의 마음 속 깊이 찔려있는 상태이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의 저녁 무렵, 나는 긴자 마쓰오 앞에서 아이를 위해 산 커다란 장난감을 안고 서 있었다.
올해도 영화를 못 만들어 영화감독으로서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택시를 기다리는 내 앞을 누가 지나갔다. 그는 멈춰서 호기심과 호의의 눈빛으로 나는 쳐다보고 있었다.

"……"
"오시마씨죠?"
"…맞는데요…왜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활짝 웃었다. "영화 보고있어요. 빨리 다음 영화 보고싶어요."

빠른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달려갔다. 나의 눈에는 뜨거운 정열이 불 타오르고 풍경은 흐려졌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나는 심사위원으로 인도의 영화제에 갔다.

봄이 지나, 5월이 지나서 깐느에서 귀국한 프랑스 영화사의 시바타씨와 가즈코씨가 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찍어야만 한다고 했다.
스페인이나 유럽의 비평가로부터도 영화를 찍으라는 편지가 왔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1972년 <NATSUNOIMOTO>를 가지고 갔을 때 시작한,
도만과의 합작영화의 이야기를 실행해 옮길 결심을 했다.

아르고스 필름을 주재하는 도만은 아란 레네, 장 뤽 고다르, 크리스 마이클 등의 프로듀서이며 <교사형>과 <의식>을 프랑스에서 배급해 준 사람이다. 나의 영화가 유럽에서 최초로 배급된 것은 <교사형>이므로 유럽에서 나를 최초로 인정한 영화인이기도 하다.

그리 넓진 않지만 취미가 좋아 보이는 아파트에는 현대화가 놓여져 있다. 그는 고상함 그 자체이며 유럽영화계의 최고의 지식인이다.

도만으로부터 합작영화의 제안을 받고 3년간,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었는가.

거의 전액을 프랑스가 부담한다. 영화는 일본어로 만들어지고, 프랑스의 출연자는 없어도 되고,
스탭은 거의 다 일본인이라도 좋다는 조건.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이때까지의 합작영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그래도 무언가 모자라다, 모자라다, 라고 나는 생각해 왔었다.
시라시씨가 말하는 행동자로서의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법으로서는 뭔가 하나 부족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 이후 드디어 원판 필름을 수입해, 그것으로 촬영해 미현상인 상태에서 프랑스로 보내,
파리에서 편집, 카피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일본영화의 성표현을 한 발짝 전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의 제국>은 출발했다.

2. "포르노원년"선언

프랑스와의 합작영화 <감각의 제국> 촬영을 마치고 신년을 맞이하였다. 촬영한 필름은 미현상 상태로 파리에 보내졌고, 이미 현상은 끝나, 나는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달 10일경에는 나도 파리에 도착해 편집과 음악을 붙이는 작업에 들어간다.
완성은 2월말 경이 될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느긋하고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였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왜 이리도 즐거운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감독에게 있어서는 영화를 만드는 그 순간만이 인생인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일본의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일본영화는 "빈곤하면 둔해진다"라는 이외로 없는 상황에 처해 있어, 영화사는 각각의 노선을 지키는데 바빠서 의욕적인 재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다 영화감독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바로바로 일을 할 수 있으나, 그 시스템이 막혀서 당분간 쉬면, 새로운 시스템을 발견하기까지 작업을 시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도, 자신이 주재한 창조사와 ATG의 제휴라는 형태로, 일 천만엔 이라는 낮은 예산영화를 5년간 만들어나가다가, 힘들어서 창조사를 해산하고 72년의 를 마지막으로 3년간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감각의 제국>의 프로듀서인 도만이 나에게 합작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말한 것은 72년도 가을이었다.
도만은 아란 레네나 장 뤽 고다르의 작품을 프로듀스한 프랑스 제일의 예술파 프로듀서이자, 나의 <교사형>과 <의식>을 프랑스로 배급해서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 도만이 합작영화는 포르노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작품내용, 제작의 형태를 전부 나에게 맡긴다는 것을 듣고, 나는 일본에 귀국하자마자 두 개의 소재를 편지로 보냈다.
그 하나가 '아베사다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나머지 남자를 죽이고, 그 성기를 잘라서 들고 다녔다는, 세계에 그런 예가 없는 여자의 이야기는 교양인인 도만의 마음을 많이 흔들어 놓은 듯했다. 그 이후 그로부터 자주 사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는 재촉의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년간 나는 망설였다. 합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함을 느꼈다. 그런 내가 만들 것을 결심한 것은 일본에서 촬영하여 미 현상인 상태에서 필름을 파리로 보낸다는 방법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일본영화의 성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와카마츠코지나 카미시로 다쓰미의 훌륭한 영화가 세계에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예를 들어 헤어를 가린다는 등 성표현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합작영화라는 것을 이용하여, 성 표현을 가능한 최대로 깊이 파고들 것을 생각했다.

미 현상인 필름이므로 그냥 세관을 통과한다. 포르노가 개방된 프랑스에서는 있는 그대로 상영할 수 있다.
일본에 역수입할 때는 세관에서 컷하던가 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싸우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투지에 불타올랐다. 싸울 때는 강한 동지가 필요하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 며칠 후에 술친구이자 일본영화의 성표현을 위해 싸워왔던 와카마츠 코지를 일본에서의 제작 프로듀서로 임명하기로 결심했다.

시나리오가 완성하여 나는 술자리에서 와카마츠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와카마츠는 불과 3분만에 "재밌겠는데요. 해 봅시다."라고 웃으면서 말해 주었다., 어려웠던 건 배우 찾기였다.
그러나 의외였던 건 아베사다역에 있어서는 많은 여배우가 하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행히 마츠다 에이코라는 천재적인 신인을 얻었다. 상대편 남자 역은 기자회견 전날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후지 타츠야가 출연해 준 것에 대해서는 행운에 감사할 뿐이다. 촬영을 끝낸 지금,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존경한다.
그 외에 니카츠 로망포르노의 기둥인 여배우들과도 같이 일을 한 것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전혀 다른 감성의 배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포르노의 세기가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한 거예요?"라고 질문을 받는다. 그것은 후지씨와 마츠다씨와 나밖에 모른다. 영화를 보시면 알 겁니다. 지금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만족감으로 가득하다.
나머지는 <감각의 제국>이 일본영화의 성 표현의 돌파구가 되어,
그것과 동시에 일본영화의 해외진출의 돌파구가 되는 것을 일본의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이다.

3. 파리에서 영화의 마무리를 하며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밤늦게까지 질질 끌어가며 불건전하게 일을 한다는 인상이 일반적으로 있는지,
"늦게 일어나시죠?"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절대 아니다.
야외 촬영할 때 날씨에 신경 쓰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버린 영화감독이란 일이 없을 때에도
아침에 누구보다도 빨리 일어나 창문을 열어 좋은 날씨면 기본이 좋아지는 인종이다.

빨리 일어나는 나는 지금 파리에 있으면서 우울하다. 왜냐하면 겨울의 파리의 아침은 9시경까지 어둡기 때문이다.

원판 필름을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수입해서 촬영한다. 미현상인 상태로 파리로 보내 거기서 현상하여 편집한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일본과 프랑스의 합자영화 <감각의 제국>을 만들 것을 발상하여 지금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는 헤어는 볼 수 없고 성기나 노출이나 베드신은 절대 불가능한, 자유주의국가에서 가장 엄격한 일본의 관문을 돌파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